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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, 원태연 본문
인간이 얼마만큼의 눈물을
흘려낼 수 있는지 알려준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사진을 보지 않고도 그 순간
그 표정 모두를 떠올리게 해주는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비오는 수요일 저녁, 비오는 수요일에는
별 추억이 없었는데도
장미 한 다발에 눈 여겨지게 하는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멀쩡히 잘 살고 있던 사람
멀쩡한데도 잘 못살게 하고 있는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신이 잠을 자라고 만드신 밤을
꼬박 뜬 눈으로 보내게 만드는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강아지도 아닌데 그 냄새
그리워 먼 산 바라보게 만드는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우연히 들려오는 노래가사 한 구절 때문에
중요한 약속 망쳐버리게 만드는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껌 종이에 쓰여진 혈액형
이성관계까지 눈 여겨지게 만드는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스포츠 신문 오늘의 운세에 애정운이 좋다 하면
하루종일 호출기에 신경 쓰이게 만드는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그 날 그 순간의 징크스로
사람 반병신 만들어 놓은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담배연기는 먹어버리는 순간 소화가 돼
아무리 태워도 배가 부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목선이 아름다우면 아무리 싸구려 목걸이를 걸어주어도
눈이 부시게 보인다는 걸 알려준
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
모르겠습니다. 그 여자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는
그저 모든 이유를 떠나
내 이름 참으로 따뜻하게 불러주었던
한 여자를 사랑하다 가겠습니다.
@ 안암동, 2011년 8월 30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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